한국사에서는 8세기 후반 나말 여초(신라말 고려 초)를 후삼국시대 혹은 호족의 시대라고 한다. 그만큼 이 시대는 수 많은 군웅들과 지역 유지, 그리고 몰락한 진골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중 상당수는 엄청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흔히 후삼국 시대 하면 우리는 궁예(마진, 태봉), 견훤(후백제), 왕건(고려) 정도로만 알고 있으며 조금 더 알고 있다고 한들 양길(북원경:지금의 원주), 기훤(죽주:지금의 안성) 정도로 알고 있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명주 군왕 (지금의 강릉 일대) 김순식과 강주 장군(지금의 경상남도 진주 일대) 윤웅과 왕봉규 등 상당한 세력을 가진 호족들이 있었다.
강주 호족 왕봉규!!
특히나 왕봉규는 당시 중국의 5대 10국 중 중앙 세력이었던 후당(당대 최강대국이라고 봐도 됨)과 독자적으로 외교 하여 직위(회화대장군)를 얻어낸 호족이다. 그것도 924년과 927년 3월, 4월 세 차례 외교를 하였다. 당시 한반도의 호족들 중에서는 유일하였고 이는 견훤(장강 하류의 약소국 오월과 통교함)이나 왕건(923년 중원의 후량과 교역)도 하지 못한 외교 행위였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중국에게 관직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독립적인 나라로 인정받는다는 것인데 이는 한반도에 고려, 후백제, 신라 말고도 왕봉규의 나라 이렇게 4국이 존재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대중들은 왕봉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왜 왕봉규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가 ?
1. 고려 왕건에 의한 의도적인 기록 축소 (feat 가야)
당시 왕건에게는 지금의 김해, 진주 일대는 상당한 골치 거리였다. 이들은 고려가 가장 늦게 통일한 지역이기도 하였으며 신라에 협조적인 세력들이었고 심지어 후반에는 후백제에 협조하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건은 이 지역들을 점령하였을 때 정말 기뻐하였다(이때 소격달의 협조로 인해 강주를 점령하였으나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침공으로 인해 다시 강주 지역을 뺴앗기고 결국 후백제 멸망 직전까지 강주는 후백제의 땅이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대해 신물이 났는지 추후 왕건은 이 지역의 가야사를 집필할 때도 가야를 6가야로 축소 은폐하였으며 이로 인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가야는 금관가야를 주축으로 6가야가 있었다 정도로 알고 있다. 사실 가야는 마한, 진한, 변한 중 변한의 계보를 이어 내려왔기에 많은 군소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함안 가야리 유적, 가야시대 최대 토성으로 확인 : 국제신문 (kookje.co.kr)
2. 대중 매체에서의 소개가 없었다. (feat 태조 왕건)
2000년부터 2002년까지 KBS1TV 에서 방영하였던 전 국민 애청 드라마 태조 왕건을 보면 궁예, 견훤, 왕건들을 제외한 환선길, 복지겸, 능창 등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반해 왕봉규, 윤웅의 캐릭터는 없었을뿐더러 강주에 대한 이야기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로 인해 시청자들은 당연히 후삼국시대에는 고려, 후백제, 신라 이렇게 3국만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었고 상당한 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주 호족 왕봉규의 존재는 알지 못하였다.
3. 왕봉규에 대한 기록도 많지 않은 편이다.
우선 정사에 나온 기록에 의하면 왕봉규라는 강주 지역 호족이 있다. 이는 원래 천주(의령지역)의 호족이었으나 그 세력을 넓혀 강주 지역의 호족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과 외교를 하여 관직을 얻었다 정도의 기록만 있다. 또한 왕봉규의 기록을 볼 수 있는 또 한 권의 책이 있는데 그건 진주 소씨 족보인 동근보이다. 그러나 족보는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족보의 이야기를 모두 사실이라고 볼수는 없다. 하지만 왕봉규에 대한 기록이 너무도 없기에 우리는 동근보에 의지 할 수 밖에는 방법이 없다.
동근보의 기록에 의하면 885년 적고적이 한 참 판치고 있던 강주 지역에 이들의 토벌을 위해 강주 도독으로 파견되었던 소송이라는 자를 윤웅과 짜고 살해하였다. 소송을 살해하고 왕봉규는 소송의 부인과 결혼한다. (이때 소송의 부인은 소송의 자식을 임신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봉규는 소송의 부인과 그 자식을 자신의 친가족처럼 대한다) 그리고 윤웅과 왕봉규는 강주 지역의 적고적을 토벌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그렇게 강주 지역은 윤웅과 왕봉규의 세력권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소송의 아들인 소격달은 장성하였고 어느 날 어머니에게 자신이 왕봉규의 아들이 아닌 소송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고 소송을 죽인자가 평생을 아버지라고 믿고 있었던 왕봉규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이 말을 하고 소송의 부인은 자결한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소격달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윤웅과 왕봉규 세력들을 공격하였으나 왕봉규세력은 생각보다 결집력이 좋았고 결국 소격달은 고려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해 왕봉규 세력을 모두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까지가 동근보의 내용이다.(소격달이 진주소씨이기에 이런 내용이 족보에 있는것임)
베일에 싸인 해상 세력가 왕봉규!!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 없어서 있는 기록 만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입지의 인물인지를 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추후에 왕봉규에 관한 더 많은 기록과 유물, 유적들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다음 시간에는 오늘 살짝 언급했던 적고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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