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호족의 시대 2 (적고적의 난)

설레발유전자 2022. 7. 2. 04:30
728x90

이전의 해상 호족 세력 왕봉규편에 이어 오늘은 신라하대, 신라의 중심지이자 수도였던 금성(지금의 경주) 까지도 위협했던 적고적이라고 불리우던 이들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적고적!! 그들은 왜 적고적이라 불렸나 ? (빨간 바지의 전설...)

 

우리는 흔히 황건적, 홍건적 등 이와 비슷한 단어들을 많이 들어왔다... 

 

황건적 : 황건적은 중국의 후한 말 장각을 두령으로 하는 태평도라는 종교 단체에서 일으킨 전국적인 반란으로 그 반란군이 노란색 천을 머리에 두르고 다녔다 하여 황건적이라 불렸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삼국지연의에도 초반에 장각의 황건적이 등장한다... 

 

 

황건적

 

홍건적 : 홍건적은 중국 원나라 말기에 한족 중심의 백련교도들에 의해 일어난 반란으로 빨간 천을 머리에 두르고 다녔다고 하여 홍건적이라고 불리웠다... 훗날 이 홍건적 출신의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는걸 보면 어떤 점에서는 성공한 혁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홍건적은 우리나라와도 연관이 있는데 원에 반격에 밀리던 일부 홍건적 무리들이 고려에 2차례나 침입한적이 있기 떄문이다... (당신 북쪽에는 홍건적 남쪽에는 왜구 ... 정말이지 고려는 거란, 여진, 몽골, 왜, 홍건적 까지... 고생 많았다...) 

 

2차 침입때는 수도 개경이 함락한적도 있어서... ㄷㄷㄷ 

 

백련교도들로 구성된 홍건적들

 

거의 이런식으로의 작명 센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적고적!! 이들은 누구인가 ? 

 

적고적 : 적고적은 빨간 바지를 입고 다녔다고 하여 적고적으로 불렸고 신라 하대 진성여왕 시절 원종과 애노의 난 이후로 신라 금성 서쪽 일대에 일어난 반란의 무리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적고적도 종교집단의 반란이었나 ?

황건적은 태평도라는 종교 집단을,  홍건적은 백련교도들로 인하여 발흥한 집단이였다. 

혼란스러운 나라를 바로 잡고자 종교적 교리를 바탕으로 나라와 백성들을 구원할 교리를 전파하면서 세를 확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고적도 이러한 종교적 근본이 깔려있지 않을까 ? 

 

우선 당시 상황을 보면 김해지역에서는 불교 선종을 매우 지지하는 김인광이라는 호족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진골들이 교종을 믿었던 경향이 컸다면 호족들은 선종을 많이 의지했었다... 

 

그러기에 적고적도 선종을 바탕 근본으로 나라의 부흥을 꿈꾸지 않았을까 ? 생각한다... 

 

지역도 금성의 동남쪽이면 가장 불교적 색채가 짙었던 금관경(김해) 지역이었기에 ... 

 

우리나라 최초로 불교를 받아들여 만들어졌다는 김해시 장유사

 

적고적의 우두머리는 누구인가 ?

적고적의 수장이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알수 있는 기록은 찾지 못하였다 ... 다만 적고적의난은 원종과 애노의 난 이후에 일어난 농민 반란군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기록에서 진골이나 지방의 유지들 그리고 군벌들은 아닐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에 신라 중앙정권에 의해 토벌되었다는 기록도 없이 기록상에서 사라진것으로 보아

 

1. 자연적으로 해산했거나

2. 다른 지방의 세력에 흡수되어 성장했거나

3. 다른 호족 집단에게 토벌 되었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김해 지역의 김인광이거나  천주(의령), 강주(진주) 호족이였던 왕봉규와 윤웅 세력에 토벌 흡수 되었을 가능성 말이다. 

 

빨간 바지의 전설 적고적!!

 

 

적고적에 대해 자료나 유적지가 남아 있지 않아 적고적에 대해 더 이상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당시 신라 하대 때 백성들이 중앙정부에 느꼈던 감정이 어떤 것인 줄 알 수 있었으며 6두품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신라 진골의 정치에 염증을 느꼈고

 

그들의 부패와 향락 그리고 정권쟁탈전에 나라의 정치 경제 상황은 매우 어려워졌기에 

 

새 시대를 갈망하는 세력들이나 자기 지역만은 수호 하고자하는 세력들이 점점 증가 하였다는 결론을 도출 할 수 있다. 

 

이게 천년왕국인 신라의 몰락하는 과정이였고 그 중심에 여러 호족들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신라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 (그도 6두품 출신이였다...)

 

 

 

다음 포스트는 신라 해상강국의 창시자 장보고 사후 전라도 신안 앞바다에 출몰하여 세력을 이루었던 신라구 세력과 대표적인 신라구 우두머리였던 능창을 ...

 

그 다음 포스트에는 김해지역의 호족 세력이였던 김인광과 소충자 소율희 형제에 대해 포스팅 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