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호족의 시대 3 (김해 호족 김인광, 소율희, 소충자)

설레발유전자 2022. 7. 17.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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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는 오래전부터 한국사에 뗼레야 뗼수 없는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였다...

원삼국시대에는 금관가야 (금관국)의 수도 였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김해는 금관경이라고 하여 통일신라의 9주 5소경의 5소경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었다... 

 

신라의 수도 금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금관경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불교가 전해진 사찰인 장유사도 김해에 있고 불교 선종이 발전할수 있게 많은 고승들이 후삼국시대에 김해에 있었다...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 탑비

 

 

김 인 광 

 

당시 김해지역의 호족은 김인광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는 불교 선종에 조예가 깊어 여러방면으로 선종의 고승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었다... 이와 같은 기록은 아쉽게도 삼국사기나 고려사 같은 정사에서는 나오지 않아 위의 탑비의 문구에서만 그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있다.. .

 

지김해부 진례성제군사 명의장군(知金海府眞禮城諸軍事 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은 가정(鯉庭)에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대궐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선문에 귀의하여 숭앙하고 삼보(三寶)의 집을 돕고 수리하였다. 대사는 마음에 가련히 □□하고 여생을 보낼 뜻을 가졌다. 현묘한 종지를 높이 강연하고 부처의 도를 널리 선양하였다.

 

- 진경대사 탑비 문구중 일부- 

 

이 탑비에서 김인광이라는 인물의 이름이 처음 나왔다... 그러면 김인광은 누구인가 ?

 

그에 대한 추측은 3가지로 추측할수 있는데 

 

          1) 김해 김씨로 금관국의 대를 이어온 금관가야의 후손일것이라는 설 

          2) 경주 김씨로 신라 왕실의 진골 출신으로 금관경에 자리 잡으면서 성장한 호족이라는 설 

          3) 김해김씨도 경주김씨도 아닌 그냥 지역의 실력자로서 김해 금관경에 자리 잡은 호족이라는 설

 

이 중 무엇이 되었던 당시 김해의 호족은 김인광이었고 그는 불교 선종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호족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아낌 없는 지원에 당시 많은 선종의 고승들이 김해로 거처를 옮겨 수행을 할수 있게 된 것이다. 

 

창원 봉림사

 

위의 탑비에서 "지김해부 진례성제군사 명의장군 김인광" 이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김인관은 김해의 진례성 지역의 실권자로서의 직책을 신라 조정에서 받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여기서 또 하나 !! 현재는 창원에 있는 창원 진례산성이 김인광이 실효 지배를 하고 있었던 곳으로 예상하고 있다... 

 

창원 진례산성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이후 이 "김해부 진례성제군사 명의장군" 이라는 직책은 김인광이 아닌 소율희라는 사람이 이 직책으로 소개 되고있다...

 

삼국유사에 보면 소충자 소율희 형제가 김해를 공격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성주가 김인광이라는 확실한 기록은 없다... 

 

 

소충자 소율희 형제

 

김인광에 대한 기록 보다 소율희 , 소충자 형제에 대한 기록이 조금 더 많은데 물론 이들도 삼국사기나 고려사 같은 문헌에는 등장 하지 않고 당시에 활동한 승려들의 비문에서만 기록이 남아있다 ... 

 

이 대목에서 소율희 소충자 형제도 김인광처럼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 할수 있다 ...

 

당시 소율희, 소충자 형제가 후원했던 고승들은 이런 분이 있다... 

 

선종 불교와 소충자, 소율희 형제

 

- 심희 : 소율희의 후원으로 김해지방에서 봉림산파를 개창하고 김해에서 일생을 마쳤다.

 

- 행적 : 사굴산파의 개조 범일의 제자임, 907년 김해로 와서 소율희의 후원을 받아 8년간 머무르다가 915년 에 신라 신덕왕의 초청을 받고 경주로 갔다... 

 

- 이엄 : 후에 고려태조의 후원으로해주 지방의 광조사 에서 수미산파 를 개창한 사람으로 김해에 911년 ~ 915년 까지 4년간 머물다가 영동 지방의 영각산사로 옮겨갔다.  

 

- 진공대사 : 가지산파에 속했던 선승으로 김해에 머물다가 풍기 지방의 소백산사로 옮겨갔다.

 

- 충담 : 어느 선파의 선승인기 알길은 없으나 충담도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뒤 한떄는 김해에 머물렀었다. 그러나 후원자의 소율희,소충자 형제의 몰락을 예견하고 김해를 떠나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귀의했다. 

 

 

 

진철대사 이엄

 

소충자, 소율희 형제의 성씨에 대하여 

 

저번에 포스팅 했던 소격달 소송도 그렇고 지금 이야기하는 소율희 소충자도 그렇고 김해지역에는 유독 소씨나 김씨가 많이 있었다... 이에 제기 되는 학설 중 우리가 흔히 김씨를 한자로 쓸때

 

金(쇠금) 을 성씨로 표기를 하기에 여기에 쇠가 소라는 성씨로 이용되기도 하여 

 

김충자, 쇠충자, 소충자 이런식으로 성씨를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결국 소율희 소충자도 김해김씨나 경주김씨와 같은 핏줄 일수 있다는 이야기다. 

 

소충자와 소율희는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의 세력 확장으로 인해 세를 잃을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친 신라적 성향을 띠었던 소충자 소율희 형제였기에 몰락해가는 신라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할 수 없었다...

 

 김인광, 소율희, 소충자, 이들 다 김해지역의 호족으로 나말여초의 불교계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선종 장려 호족들이였다... 

 

충지가 소율희 ??

일연의 삼국유사 기록을 보면 신라 잡간의 관등으로서 금관고성(지금의 김해) 을 공격하여 취하고 성주장군이 되었다는 충지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이 충지(907년~911년)가 이전의 지배자였던 소율희 라는 설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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